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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2일부터 18일까지 일주일 동안 중국 윈난성의 자연 유산과 문화유산을 탐사했다. 강의 협곡과 길을 따라 차마고도가 형성되어 있고, 옛길 주변으로 그들이 만들어낸 역사와 문화유산이 잘 남아 있다. 이 지역의 아름다운 자연, 차마고도 지역 소수민족이 남긴 문화와 예술, 티베트 불교의 특징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인천에서 윈난성 성도 쿤밍으로 들어가 따리, 리장, 샹그릴라를 답사하고 쿤밍으로 나왔다. <기자말>
[이상기 기자]
따리 고성의 역사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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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리고성 개념도: 도성이 가운데 있고, 좌측에 하관 우측에 상관이 있다. 위쪽은 창산이고 아래쪽은 얼하이다.
모바일바다이야기하는법ⓒ 이상기
따리 고성은 한나라 때 접유현(楪楡縣) 치소로 출발한다. 당나라 때 남조국 왕도가 되었고, 송나라 때인 937년 따리국 국도가 되었다. 따리라는 국호는 "큰 정치와 큰 이치로 나라와 연방을 부흥하게 한다(大治大理 富國興邦)"에서 따 모바일바다이야기하는법 왔다고 한다. 당시 따리는 중국과 동남아를 연결하는 교통로 상에 있어 상업과 무역이 발달한 국제도시였다. 따리국은 1253년까지 300년 이상 번성했는데, 이때 따리 도성이 만들어졌다. 창산과 얼하이 사이 남북으로 길게 발달한 성으로, 북문 밖에 숭성사가 위치하고 있다.
따리는 1254년 원나라 세 황금성사이트 조 쿠빌라이에 의해 점령되어 총관부(摠管府)가 들어서면서 지방정부의 치소로 위상이 낮아졌다.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되면서 따리부성(府城)이 되었고, 동쪽과 남쪽을 확장해 현재 따리 고성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기록에 의하면 성곽의 길이가 남북으로 9리, 동서로 3리가 되었다고 한다. 성벽의 높이는 25척, 두께는 20척이었고, 성곽을 따라 각루(角樓)와 적 바다이야기꽁머니 대(敵臺)가 있었다. 동서남북 사대문이 있고, 문 위로 중층 누각이 설치되었다. 성문의 이름은 동쪽 통해문(通海門) 서쪽 창산문(蒼山門) 남쪽 승은문(承恩門) 북쪽 안원문(安遠門)이었다.
▲ 따리 고성 수구문에 해당하는 홍룡정문
ⓒ 이상기
통해는 동쪽 얼하이로 통한다는 뜻이고, 창산은 서쪽에 창산이 있다는 뜻이다. 승은은 정치적인 내용으로, 나랏님의 은덕을 대대손손 이어간다는 뜻이다. 안원은 북쪽이 안전하길 바라는 군사적인 내용으로, 멀리 있는 티베트와의 관계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따리는 도로와 치수가 격자 모양으로 이루어진 계획도시다. 그리고 정치 군사적으로 중요한 부서가 남북을 잇는 중심도로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 따리 아문을 중심으로 한 관청, 문묘와 무묘가 남서쪽에 위치했다. 이에 비해 북동쪽에는 수공업자와 상인들이 거주하며 생업활동을 했다.
성밖 남서쪽에는 탑이 하나 있는 홍성사(弘聖寺), 북서쪽에는 탑이 세 개 있는 숭성사가 있다. 청나라 가경 도광 연간에 따리 성내에는 1만 3000호에 6만 명의 주민이 살았다고 한다. 중화민국 시기 따리 고성은 정방형의 도시로 9가(街) 18항(巷)으로 이루어졌다. 박애로(博愛路)에서 수구문(水口門)에 해당하는 홍룡정문(紅龍井門)을 지나 동쪽으로 수로가 만들어져 있고, 수로를 따라 내려가면 따리 고성에서 유명한 우물 홍룡정(紅龍井)에 이르게 된다. 홍룡정은 따리 고성의 옛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2003년 복원한 인공적인 수로(水路) 풍경구다.
오화루 남북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다
▲ 따리 고성의 중간에 있는 오화루
ⓒ 이상기
창산에서 흘러내린 물과 홍룡정에서 샘솟는 맑은 물이 수로를 따라 흐르게 해, 관광객이 자연을 즐기면서 휴식할 수 있게 만들었다. 계단식 수로 주변에는 버드나무, 계수나무 등을 심고 옥배추와 십이지신상 등 조각을 설치하고, 수로를 건너다닐 수 있도록 다리를 만들었다. 이 사업은 따리 고성의 풍광을 아름답게 하고, 사람들이 자연과 여유를 즐기자는 목적에서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고성 안 집 앞으로 물이 흐르고, 그 물을 활용해 집집마다 꽃을 가꾸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수로는 오화루(五華樓)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부흥로(復興路)까지도 이어진다. 오화루는 따리 고성 중앙에 위치한 상징 건물로, 남조국 시대 국가의 중요 행사를 진행하는 영빈관이었다. 명나라 초 불에 타 없어진 후 이곳에 종루(鐘樓)와 고루(鼓樓)가 설치되면서 오화루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문화혁명으로 철거된 것을 1998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재건했다. 오화루는 따리 사람들의 약속 장소일 뿐 아니라, 주변에 서화를 제작하고 판매하는 상가들이 밀집해 있어 관광객들의 필수 관람코스가 되었다.
▲ 오화루에서 바라본 따리 고성 북쪽의 모습
ⓒ 이상기
오화루는 1층 기단에 문이 있고, 그 위에 삼층의 누각을 올렸다. 누각 2층에 오화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누각으로 올라가면 사방으로의 조망이 좋다. 남쪽으로 남문루가 보인다. 북쪽으로 가까운 곳에 공자를 모신 사당 문묘가 있다. 북서쪽으로는 숭성사 삼탑이 아련하게 보인다. 동쪽으로 얼하이는 건물들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서쪽으로 창산의 산줄기는 워낙 높고 길어 잘 보인다. 누각 내부에서는 이곳이 종루임을 알 수 있는 편경과 편종을 볼 수 있다. 누각 창과 문의 나무 조각 장식은 정교하고 화려하다.
문묘는 공자 사당, 문화관, 도서관이 있는 복합 문화단지다. 1885년 보국사(報國寺) 자리에 문묘가 재건되었다. 부흥로 쪽으로 동향하고 있으며, 영성문에서 대성전에 이르기까지 건물이 일직선상에 위치한다. 대성전에는 만세사표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전각 안에 공자의 위패와 조소상이 모셔져 있다. 공자 좌우에는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네 성인이 협시하고 있다. 그리고 양쪽 벽에는 각 6명씩 공문 12철(孔門十二哲) 조소상이 서 있다. 12명의 현인 중 송나라 때 주희는 공자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 따리 고성 문묘: 공자사당
ⓒ 이상기
부흥로 끝에 있는 북문은 명나라 때인 1382년 세워져 안원루 또는 삼탑문으로 불렸다. 문이 통과하는 1층 기단부 위에 2층의 누각을 올렸다. 명나라 때 건축양식을 유지하고 있다. 인민로에 있는 동문 역시 1층 기단부 위에 2층의 누각을 올렸다. 얼하이문으로 불리는데 이곳에서 얼하이를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산문으로 불리는 서문 역시 1층 기단부 위에 2층의 누각을 올렸다. 누각의 이름은 영진루(永鎭樓)다. 창산을 나가 중화봉(中和峰) 쪽으로 2리쯤 올라가면 창산신을 모신 창산묘(蒼山廟)에 이르게 된다.
문헌명방(文獻名邦) 편액이 걸려 있는 남문루
▲ 문헌루로 불리는 남문
ⓒ 이상기
이제 오화루 남쪽으로 길을 따라 간다. 그곳에 따리 고성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남문이 있다. 승은문으로 불리는 남문에는 1층 기단부 위에 문헌루(文獻樓)라 불리는 2층 누각이 세워져 있다. 기단부 위에는 1961년 궈모루(郭沫若)이 쓴 따리(大理)라는 석각이 새겨져 있고, 2층 누각에는 문헌명방(文獻名邦)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문학에 밝은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고, 문헌이 풍부하게 소장된 훌륭한 지방이라는 뜻이다. 이 글씨는 청나라 강희제 때 운남제독을 지낸 편도(偏圖)가 썼다고 한다.
이때부터 남문은 문헌루라 불리게 되었다. 문헌루는 문화혁명으로 훼손되었고, 1998년 복원을 거쳐 1999년 4월 준공되었다. 동서쪽 길이가 60m, 남북쪽 폭이 30m, 높이가 24m나 되는 대형 누각이다. 문헌루에는 높이 6m에 이르는 성벽이 연결되어 방어성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성벽 위로 길이 나 동서 1.5㎞를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문헌루 주변만 올라갈 수 있다. 문헌루 기둥에는 따리의 근대 시인 주인(周仁)이 쓴 "따리국이 이 세상에 영원히 살아남기를 바라는 염원"이 적혀 있다.
▲ 인민영웅기념상
ⓒ 이상기
문헌루에서 북쪽 오화루 방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인민영웅기념상을 만난다. 중화민국 시대인 1910년대 조국을 위해 싸운 무명용사로, 특정 인물을 조각하지는 않았다. 소총을 들고 철모를 쓴 모습의 젊은이로 1990년대 5m 높이로 조성되었다. 조각상 건너편에는 총통병마대원수부가 있다. 두문수(杜文秀) 원수부 구지라고도 불리는데, 그것은 회족 지도자인 두문수가 1856년 따리 혁명정권을 수립하고 총통병마대원수에 취임했기 때문이다.
그는 회족과 한족이 하나로 뭉쳐 정의의 깃발을 높이 들고 만주족을 몰아내고 중화제국을 복원하려고 했다. 부패를 척결하고 백성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제폭구민(除暴救民) 혁명만청(革命滿淸) 같은 구호를 외치며 청나라에 대한 혁명 투쟁을 10년 이상 계속했다. 두문수의 혁명군은 내부적으로 엄격한 군기를 시행하고 민족단결을 추구했다. 외부적으로는 농공상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생업에 충실하며, 교역을 통해 평화롭게 사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를 통해 따리 지역 백성들의 마음을 얻게 되었다.
▲ 따리 고성에 있는 총통병마대원수부
ⓒ 이상기
그는 태평천국 운동에 가담해 세금을 낮추고 생산을 장려하는 정책을 시행해 경제 발전과 사회 안정을 도모했다. 그리고 민족 대단결을 위해 다양한 민족 출신의 유능한 인재들을 등용해 세력을 키워 나갔다. 전성기에는 윈난 53개 현을 점령하고 청나라 군대의 대규모 진압 작전을 무력화시켰다. 1867년 10월에는 20만 군대를 이끌고 쿤밍을 공격할 정도였다. 그러나 1864년 태평천국 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청나라 군대와 직접 대면해 싸우면서 더 이상 동쪽으로 진출하지 못했다. 그리고 1872년 11월 따리를 포위한 청나라 군대와 싸우다 전사하고 말았다.
1856년부터 1872년까지 운영되었던 원수부는 정문인 오문(午門), 전전(前殿)과 후전(後殿)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전은 가운데 의사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남화청과 북화청이 위치한다. 후전은 군기처인 백호당(白虎堂)을 중심으로 거실, 침실, 서재 등이 위치한다. 1986년 원수부에 대리시 박물관이 들어왔고, 1988년 총통병마대원수부 삼문이 설치되어 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박물관에는 따리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6개 전시관이 운영된다: 고대 서화, 불교예술, 명대 도자기, 윈난 역사, 두문수 의병, 따리 예술가. 그리고 비림(碑林)에서는 따리국으로부터 중화민국에 이르는 675점의 비석을 볼 수 있다.
[이상기 기자]
따리 고성의 역사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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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리고성 개념도: 도성이 가운데 있고, 좌측에 하관 우측에 상관이 있다. 위쪽은 창산이고 아래쪽은 얼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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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리 고성은 한나라 때 접유현(楪楡縣) 치소로 출발한다. 당나라 때 남조국 왕도가 되었고, 송나라 때인 937년 따리국 국도가 되었다. 따리라는 국호는 "큰 정치와 큰 이치로 나라와 연방을 부흥하게 한다(大治大理 富國興邦)"에서 따 모바일바다이야기하는법 왔다고 한다. 당시 따리는 중국과 동남아를 연결하는 교통로 상에 있어 상업과 무역이 발달한 국제도시였다. 따리국은 1253년까지 300년 이상 번성했는데, 이때 따리 도성이 만들어졌다. 창산과 얼하이 사이 남북으로 길게 발달한 성으로, 북문 밖에 숭성사가 위치하고 있다.
따리는 1254년 원나라 세 황금성사이트 조 쿠빌라이에 의해 점령되어 총관부(摠管府)가 들어서면서 지방정부의 치소로 위상이 낮아졌다.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되면서 따리부성(府城)이 되었고, 동쪽과 남쪽을 확장해 현재 따리 고성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기록에 의하면 성곽의 길이가 남북으로 9리, 동서로 3리가 되었다고 한다. 성벽의 높이는 25척, 두께는 20척이었고, 성곽을 따라 각루(角樓)와 적 바다이야기꽁머니 대(敵臺)가 있었다. 동서남북 사대문이 있고, 문 위로 중층 누각이 설치되었다. 성문의 이름은 동쪽 통해문(通海門) 서쪽 창산문(蒼山門) 남쪽 승은문(承恩門) 북쪽 안원문(安遠門)이었다.
▲ 따리 고성 수구문에 해당하는 홍룡정문
ⓒ 이상기
통해는 동쪽 얼하이로 통한다는 뜻이고, 창산은 서쪽에 창산이 있다는 뜻이다. 승은은 정치적인 내용으로, 나랏님의 은덕을 대대손손 이어간다는 뜻이다. 안원은 북쪽이 안전하길 바라는 군사적인 내용으로, 멀리 있는 티베트와의 관계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따리는 도로와 치수가 격자 모양으로 이루어진 계획도시다. 그리고 정치 군사적으로 중요한 부서가 남북을 잇는 중심도로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 따리 아문을 중심으로 한 관청, 문묘와 무묘가 남서쪽에 위치했다. 이에 비해 북동쪽에는 수공업자와 상인들이 거주하며 생업활동을 했다.
성밖 남서쪽에는 탑이 하나 있는 홍성사(弘聖寺), 북서쪽에는 탑이 세 개 있는 숭성사가 있다. 청나라 가경 도광 연간에 따리 성내에는 1만 3000호에 6만 명의 주민이 살았다고 한다. 중화민국 시기 따리 고성은 정방형의 도시로 9가(街) 18항(巷)으로 이루어졌다. 박애로(博愛路)에서 수구문(水口門)에 해당하는 홍룡정문(紅龍井門)을 지나 동쪽으로 수로가 만들어져 있고, 수로를 따라 내려가면 따리 고성에서 유명한 우물 홍룡정(紅龍井)에 이르게 된다. 홍룡정은 따리 고성의 옛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2003년 복원한 인공적인 수로(水路) 풍경구다.
오화루 남북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다
▲ 따리 고성의 중간에 있는 오화루
ⓒ 이상기
창산에서 흘러내린 물과 홍룡정에서 샘솟는 맑은 물이 수로를 따라 흐르게 해, 관광객이 자연을 즐기면서 휴식할 수 있게 만들었다. 계단식 수로 주변에는 버드나무, 계수나무 등을 심고 옥배추와 십이지신상 등 조각을 설치하고, 수로를 건너다닐 수 있도록 다리를 만들었다. 이 사업은 따리 고성의 풍광을 아름답게 하고, 사람들이 자연과 여유를 즐기자는 목적에서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고성 안 집 앞으로 물이 흐르고, 그 물을 활용해 집집마다 꽃을 가꾸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수로는 오화루(五華樓)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부흥로(復興路)까지도 이어진다. 오화루는 따리 고성 중앙에 위치한 상징 건물로, 남조국 시대 국가의 중요 행사를 진행하는 영빈관이었다. 명나라 초 불에 타 없어진 후 이곳에 종루(鐘樓)와 고루(鼓樓)가 설치되면서 오화루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문화혁명으로 철거된 것을 1998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재건했다. 오화루는 따리 사람들의 약속 장소일 뿐 아니라, 주변에 서화를 제작하고 판매하는 상가들이 밀집해 있어 관광객들의 필수 관람코스가 되었다.
▲ 오화루에서 바라본 따리 고성 북쪽의 모습
ⓒ 이상기
오화루는 1층 기단에 문이 있고, 그 위에 삼층의 누각을 올렸다. 누각 2층에 오화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누각으로 올라가면 사방으로의 조망이 좋다. 남쪽으로 남문루가 보인다. 북쪽으로 가까운 곳에 공자를 모신 사당 문묘가 있다. 북서쪽으로는 숭성사 삼탑이 아련하게 보인다. 동쪽으로 얼하이는 건물들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서쪽으로 창산의 산줄기는 워낙 높고 길어 잘 보인다. 누각 내부에서는 이곳이 종루임을 알 수 있는 편경과 편종을 볼 수 있다. 누각 창과 문의 나무 조각 장식은 정교하고 화려하다.
문묘는 공자 사당, 문화관, 도서관이 있는 복합 문화단지다. 1885년 보국사(報國寺) 자리에 문묘가 재건되었다. 부흥로 쪽으로 동향하고 있으며, 영성문에서 대성전에 이르기까지 건물이 일직선상에 위치한다. 대성전에는 만세사표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전각 안에 공자의 위패와 조소상이 모셔져 있다. 공자 좌우에는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네 성인이 협시하고 있다. 그리고 양쪽 벽에는 각 6명씩 공문 12철(孔門十二哲) 조소상이 서 있다. 12명의 현인 중 송나라 때 주희는 공자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 따리 고성 문묘: 공자사당
ⓒ 이상기
부흥로 끝에 있는 북문은 명나라 때인 1382년 세워져 안원루 또는 삼탑문으로 불렸다. 문이 통과하는 1층 기단부 위에 2층의 누각을 올렸다. 명나라 때 건축양식을 유지하고 있다. 인민로에 있는 동문 역시 1층 기단부 위에 2층의 누각을 올렸다. 얼하이문으로 불리는데 이곳에서 얼하이를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산문으로 불리는 서문 역시 1층 기단부 위에 2층의 누각을 올렸다. 누각의 이름은 영진루(永鎭樓)다. 창산을 나가 중화봉(中和峰) 쪽으로 2리쯤 올라가면 창산신을 모신 창산묘(蒼山廟)에 이르게 된다.
문헌명방(文獻名邦) 편액이 걸려 있는 남문루
▲ 문헌루로 불리는 남문
ⓒ 이상기
이제 오화루 남쪽으로 길을 따라 간다. 그곳에 따리 고성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남문이 있다. 승은문으로 불리는 남문에는 1층 기단부 위에 문헌루(文獻樓)라 불리는 2층 누각이 세워져 있다. 기단부 위에는 1961년 궈모루(郭沫若)이 쓴 따리(大理)라는 석각이 새겨져 있고, 2층 누각에는 문헌명방(文獻名邦)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문학에 밝은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고, 문헌이 풍부하게 소장된 훌륭한 지방이라는 뜻이다. 이 글씨는 청나라 강희제 때 운남제독을 지낸 편도(偏圖)가 썼다고 한다.
이때부터 남문은 문헌루라 불리게 되었다. 문헌루는 문화혁명으로 훼손되었고, 1998년 복원을 거쳐 1999년 4월 준공되었다. 동서쪽 길이가 60m, 남북쪽 폭이 30m, 높이가 24m나 되는 대형 누각이다. 문헌루에는 높이 6m에 이르는 성벽이 연결되어 방어성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성벽 위로 길이 나 동서 1.5㎞를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문헌루 주변만 올라갈 수 있다. 문헌루 기둥에는 따리의 근대 시인 주인(周仁)이 쓴 "따리국이 이 세상에 영원히 살아남기를 바라는 염원"이 적혀 있다.
▲ 인민영웅기념상
ⓒ 이상기
문헌루에서 북쪽 오화루 방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인민영웅기념상을 만난다. 중화민국 시대인 1910년대 조국을 위해 싸운 무명용사로, 특정 인물을 조각하지는 않았다. 소총을 들고 철모를 쓴 모습의 젊은이로 1990년대 5m 높이로 조성되었다. 조각상 건너편에는 총통병마대원수부가 있다. 두문수(杜文秀) 원수부 구지라고도 불리는데, 그것은 회족 지도자인 두문수가 1856년 따리 혁명정권을 수립하고 총통병마대원수에 취임했기 때문이다.
그는 회족과 한족이 하나로 뭉쳐 정의의 깃발을 높이 들고 만주족을 몰아내고 중화제국을 복원하려고 했다. 부패를 척결하고 백성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제폭구민(除暴救民) 혁명만청(革命滿淸) 같은 구호를 외치며 청나라에 대한 혁명 투쟁을 10년 이상 계속했다. 두문수의 혁명군은 내부적으로 엄격한 군기를 시행하고 민족단결을 추구했다. 외부적으로는 농공상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생업에 충실하며, 교역을 통해 평화롭게 사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를 통해 따리 지역 백성들의 마음을 얻게 되었다.
▲ 따리 고성에 있는 총통병마대원수부
ⓒ 이상기
그는 태평천국 운동에 가담해 세금을 낮추고 생산을 장려하는 정책을 시행해 경제 발전과 사회 안정을 도모했다. 그리고 민족 대단결을 위해 다양한 민족 출신의 유능한 인재들을 등용해 세력을 키워 나갔다. 전성기에는 윈난 53개 현을 점령하고 청나라 군대의 대규모 진압 작전을 무력화시켰다. 1867년 10월에는 20만 군대를 이끌고 쿤밍을 공격할 정도였다. 그러나 1864년 태평천국 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청나라 군대와 직접 대면해 싸우면서 더 이상 동쪽으로 진출하지 못했다. 그리고 1872년 11월 따리를 포위한 청나라 군대와 싸우다 전사하고 말았다.
1856년부터 1872년까지 운영되었던 원수부는 정문인 오문(午門), 전전(前殿)과 후전(後殿)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전은 가운데 의사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남화청과 북화청이 위치한다. 후전은 군기처인 백호당(白虎堂)을 중심으로 거실, 침실, 서재 등이 위치한다. 1986년 원수부에 대리시 박물관이 들어왔고, 1988년 총통병마대원수부 삼문이 설치되어 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박물관에는 따리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6개 전시관이 운영된다: 고대 서화, 불교예술, 명대 도자기, 윈난 역사, 두문수 의병, 따리 예술가. 그리고 비림(碑林)에서는 따리국으로부터 중화민국에 이르는 675점의 비석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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